친구 경남 산청 소룡산, 그리고 가야 구형왕릉

페이지 정보

작성자 표유신01 댓글 0건 조회 5,384회 작성일 20-03-31 21:07

본문

경남 산청 소룡산, 그리고 가야 구형왕릉

2019. 오디와 산딸기가 익어가는 오월 하순에 


여전히 내 삶은, 생활은 내 것이 아니었다.

주체적 시간을 이어가려 했지만 여의치 못했다.


가출 3인방의 가출.

그러나 나는 한 타임 뒤에 따라가야 했다.


다들 소룡산 정상 인근에서 바람맞으며 소주잔 기울일 때 나는 남부터미널을 향하는 지하철 안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연 속에서 잠을 청할 때 나는 산청행 버스에서 졸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잠이라도 들면 도착지를 놓칠까 봐 걱정하는 자리였다.

새벽 1시 55분 산청 터미널 도착.


배낭을 멘 이는 혼자였다.

3명이 내렸지만 둘은 각자 자기 영역으로.

난 혼자 낯선 고장에서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다.


고민이 시작됐다.

이 시간에 산에 올라 일행과 합류?

어디서 적당하게 시간 보내다 날 밝으면 합류?


후자에 마음을 굳혔다.

문제는 어디에서 어떻게 보내냐 하는 것.


시골 대합실에서 시간을 보내려 했건만 이곳은 닫혀 있다.

그러면--

어디 쉴만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터미널 주차장 한편에 작은 정자가 있다.

저곳?

그러나 그곳엔 사내 3명이 술 취한 소리로 이야기판을 벌이고 있다.

우 씨--


불을 켜고 있던 택시도 마지막 손님을 기다리다 없자 휑하니 가버린다.

난 어딜 가야 하나--


터미널과 마주한 택시정류장.

빈 택시 2대.

불 켜진 사무실.

그리고 그 앞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한 사람. 나.


30여 분 후.

드디어 정자에 있던 사내들이 떠났다.

그곳으로 슬금슬금.


잠시 앉아 있다 침낭을 꺼냈다.

비몽사몽간의 새벽.

꿈꾸다 깨어보니 5시다.


침낭을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고 잠자던 택시 기사 깨워 차황면 버섯연구소로--


 

< 새벽의 산청버스터미널 >


고개를 넘고 지나 20여 분 후 도착한 차황면 소룡산 입구.

이곳은 산청과 거창의 경계이기도 하다.

버섯연구소 가는 길을 따라가면 소룡산 오르는 길이 있다.

안내판이 제대로 없어 등산 앱 켜서 수시로 길을 확인해야 했다.





 

< 소룡산 입구, 저곳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다라 가면 버섯연구소가 있고 등산로는 버섯연구소 주변을 감싼 전기 철책을 따라 나있다 >



 

30여 분 길을 오르니 먼저 오른 이들의 캠프가 보였다.

후- 다 왔다.


박배낭을 메고 어디를 오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행이다.

짐을 가벼이 하려 해도 이것저것 챙겨 넣다 보면 메고 일어서기가 수월찮다.

특히 먹거리를 넉넉하게 넣고 한두 병의 술까지 넣는다면--

그래도 사람들은 고행 끝에 만날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을 위해 길을 떠난다.

이런 것이 구도자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까?

백패커들은 모두 구도를 향한 수행자다.

삶의 스트레스를 녹이고 희열을 맛보고자 하는 것.










(맞은편 황매산)



(멀리 지리산쪽)




 

일출을 보려 했지만 이미 해는 떠오른 뒤다.

대신 아무도 없는 소룡산 정상에서 만나는 시원한 공기와 바람은 비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 디.

좋다. 그냥 좋다.

심야버스를 이용하며 넌 길을 온 피로도, 터미널 야외 마룻바닥에서 그야말로 한뎃잠을 잔 몇 시간 전의 기억도

시원한 바람, 맑은 공기, 더 멋진 풍경들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다 보면 다 잊힌다.


소룡산은 경남 산청군과 거창군의 경계에 자리한 아담한 산이다. 독특한 빼어남도 없는 산이기에 멀리 걸음 하여 오려면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기맥종주나 아님 다른 것.

보통은 이웃 바람산과 연계해 3-4시간 산행을 하기 적합하다.


우리가 이곳에 걸음 한 것은 해마다 산청군 차황면에서 열리는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판 때문이었다.

원래 3인의 가출은 예정되어 있었고, 이관장이 장사익 공연에 참석한다고 해서 그에 맞춰 산청 쪽 산을 찾은 것이었다.


황매산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웠으나 일행과의 합류가 늦어지면서 찾은 곳이 바로 소룡이다.


산정에서 간단한 아침.

누룽지에 김치 하나라지만 언제나 특별하다.

멋. 맛.

우선은 기분이 최고다.


장사익의 찔레꽃 노랫말은 너무 애절하다.

해마다 하얀 찔레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지금쯤이면 늘 이 노랫말이 생각난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하얀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질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찔레꽃처럼 울었지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사랑했지
찔레꽃처럼 살았지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산청 차황면 늙은 버드나무가 다시 잎을 피운 금포숲 뚝방에선 해마다 5월이면 장사익의 찔레꽃 공연이 열린다.

좁은 산골마을은 차들이 가득 차고

막 해가 기울 땐 장사익의 구성진 노랫소리가 밤하늘 공기를 가른다.


찔레꽃처럼 울었지----


금포숲을 지나 금사면 왕산 기슭 구형왕릉으로 향했다.

 

 



















 

산기슭에 돌을 쌓아 만든 무덤 같은 구조물

가야 왕 구형왕릉이라 해서 사적으로 지정된 곳이지만 왕의 무덤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논란이다.

어떤 이들은 사찰의 탑이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왕의 무덤이라 한다.


현재는 조선시대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구형왕릉이라 한다.


가야, 특히 금관가야의 주 세력 근거지가 이곳이 아니고 무더기 형태의 석탑이 다른 곳에도 있는 만큼 가야왕의 무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가 왕릉이라 하니 왕릉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곳에 있는 안내판에는 그랬다.

왕의 무덤을 돌로 만든 이유는 나라를 통째 다른 나라에 바친 마지막 왕의 자책이다.

나라는 넘겨준 왕이 무슨 염치로 편안한 흙무덤을 하겠느냐는 것.

그래서 남겨진 사람들은 돌로 탑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다.


좋은 의미로는 그랬다.

이미 국운은 쇠해졌고 신라는 점차 힘을 얻는 시대.

정복 전쟁을 한다면 작은 가야는 피해만 양산할 뿐 신라를 이길 방도는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생명과 신체, 재산을 온전히 보존할 방법은 단 하나.

종묘사직을 신라에 넘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야, 즉 금관가야는 신라와 한 몸이 되었고, 양왕 또는 구형왕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이 된 것이다.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룬 김유신도 이들의 자손이었고, 구형왕릉 인근은 김유신이 심신을 연마한 곳이라는 얘기도 전한다.

돌무덤 앞의 비석이나 문인, 무인석은 후대(조선시대)에 후손(김해김씨)들이 만들어 세운 것이라 한다.


부산에서 왔다는 한무리의 사람들.

산에 오르기 위한 것 같지는 않고 구형왕릉을 보고 나더니 배낭에서 막걸리부터 내놓는다.

왕의 고혼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놀러 나왔으니 술부터 마시자는 것.

음주 관광. 뭐 그런 것이다.


왕릉에서 큰 도로로 나오면 구형왕 덕양전이 있다. 

왕릉에 따른 제실 격이다.





html>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98건 4 페이지
커뮤니티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10675 친구
표유신01
6092 21:15
110674 친구
표유신01
6477 21:09
110672 친구
표유신01
5926 21:09
110527 친구
표유신01
5791 00:34
110332 친구
표유신01
6348 16:05
110323 친구
표유신01
6294 15:51
109952 친구
표유신01
5905 14:01
109950 친구
표유신01
6259 13:58
109164 친구
표유신01
6436 02:24
109163 친구
표유신01
6737 02:24
108431 친구
표유신01
6418 13:06
107562 친구
표유신01
6251 12:29
열람중 친구
표유신01
5384 21:07
106706 친구
표유신01
6088 12:51
106111 친구
표유신01
6342 21:26
게시물 검색